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훈요 10조 (문단 편집) === 제3조: 계승자 원칙에 관한 배경 추측 === 우선 적자 적손에게 나라를 전하라는 구절은 장자였던 [[견신검]]을 무시하고 [[견금강]]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가 패가망신한 [[견훤]]의 전례를 직접적으로 보고 깨달았기에 내린 유훈인 듯 하다. 왕건 본인도 견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외가 가문의 세력이 별로 시원찮았던 장남 [[왕무]]를 정치 공작을 통해 후계자로 삼는데 성공하였다. 거기다 굳이 견훤의 예가 아니더라도 장자상속이 확립되지 못한 왕조의 운명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본다면 충분히 강조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문제는 적자적손 원칙을 밝힌 그 뒷부분에 요 임금이 사위 순 임금에게 왕위를 계승한 사례를 들며 '장남이 무능하면 그 이하 형제가 계승해도 좋다'고 해석될 만한 말을 덧붙였다는 점이다. 당연히 비판의 소지가 있는 부분으로, 이 조항 때문인지 고려는 삼국이나 [[발해]]·[[조선]] 등 다른 왕조들과 비교해 유독 아들, 그 중에서도 [[장남]]을 내버려두고 동생들 중 한 명에게 왕위를 넘긴 사례가 많다.[* 삼국은 초반에는 계승제도가 완전히 확립되지 않아 불안정했지만 제도가 확립된 뒤로는 장자계승제가 안착하였다.] 당장 위에서 언급한 대로 왕건 자신이 온갖 노력을 다해 겨우 왕위에 올린 [[혜종(고려)|혜종]]이 동생들인 [[정종(고려 3대)|정종]]과 [[광종(고려)|광종]]의 무자비한 왕권 도전에 시달린 끝에 왕위를 뺏기다시피 내줄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반란과 유혈사태들이 벌어진 것을 감안하면 안 붙이느니만 못하다란 악평이 있다. 하지만 이는 달리 생각해볼 만한 문제로, 이 "장자가 불초할 때~"의 문구는 아마 왕건이 붙이고 싶어 붙인 문구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초기 고려는 왕건 개인의 카리스마와 친화력을 접착제 삼아 각지의 유력 호족들을 엉성하게 붙여놓은 형태의 국가였다. 고려 개국 1등공신 4명, 2등공신 7명인데, 3등공신은 수천 명이나 되는 것도 이 때문으로 고려 개국에 따른 각 지역 호족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였다.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이 온전히 그 지역을 다스리는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로 봐서 초기 고려는 후대의 조선은 커녕, 오히려 [[통일신라]]의 전성기 때보다도 퇴보했던 상태였다. 고려 초기의 호족은 조선시대 권력층처럼 관직이나 왕의 총애를 기반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식이 아닌 자신이 기반한 지역을 직접 통치하면서 형성한 세력[* 당연히 군사력과 그를 지탱하는 경제력을 포함하며 상당수는 왕건으로부터 지역 통치권까지 하사받아 정당한 지역 통치자로서의 권위도 같이 지녔다.]을 기반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즉, 사실상 [[군벌]]이라고 봐야 할 이런 호족들이 연대한다면 왕위찬탈은 물론이요 아예 국가 전복까지도 가능한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왕건이 괜히 부인을 29명을 둔게 아니다. 반론이 존재하긴 하지만 고려 초기 중앙 관제가 군사 - 행정 양 면에서 왕의 뜻을 받는 기관(내봉성 - 내의성과 병부)과 호족들의 의견을 전달하는 기관(광평성 - 순군부)으로 양분돼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당시의 고려는 호족들의 발언권이 강력했다. 고려사(高麗史)가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 서술되다 보니 고려 왕에 대한 기록이 많고, 고려 신하들에 대한 기록은 대거 축소되었는데, 이는 중앙집권제가 완성된 조선 왕조의 시각이 반영된 것으로, 실제 고려에서 호족들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왕건이 복잡한 혼인관계와 개인적인 친화력과 카리스마로 이를 연결시켜 놓았다해도 생전에야 별 문제가 없겠지만 자신의 사후에 그 연결이 유지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 고려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하기 위해 장남인 혜종을 차기 후계자로 내정한 것도 왕건이 살아있을 당시엔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겠지만, 왕건이 승하한 후엔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왕건은 혜종에게 후견인으로 문·무 양면에서 당시 최고위 신하였던 [[왕규]]와 [[박술희]]를 붙여줄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유언으로까지 '장남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라고 못박아버린다면 호족들이 어떤 심정일지는 굳이 길게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즉, 굳이 쓸데 없이 덧붙인 듯한 '장자가 불초할 때에는~'이란 문장은 후사 문제에 관해 왕건이 실시한 왕권 강화책에 불만을 가진 호족들을 달래기 위한 일종의 립서비스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 뒤의 역사 진행 과정을 모두 알고 있는 후세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말도 안되는 짓이었다고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왕건의 입장에선 자신이 직접 혜종을 다음 왕으로 공인했고 거기에 보완책으로 왕규와 박술희라는 당시로선 최선의 후견인을 내세웠으며 혜종 본인도 전쟁터에서 활약한 능력있는 인물이었기에 이 정도면 [[정종(고려 3대)|왕요]]와 [[광종(고려)|왕소]]를 앞세운 호족들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에 더불어 왕건은 본인의 자식들에게도 근친결혼을 장려하여 자식들의 외가인 대호족들이 결혼을 통해 다른 호족들과 세력 연대를 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다. 단, 예외적으로 혜종은 다른 가문의 여성과 족외혼을 했다.] 따라서 이 정도로 호족들을 견제해놓은 상황에서 굳이 유훈인 훈요 십조에서까지 장자 계승을 못박는다면 호족들을 지나치게 압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왕건 본인의 예상으론 혜종이 왕위를 굳건히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므로 당시 호족을 달래기 위해 사족같은 둘째 이하가 계승 가능한 경우를 언급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상당 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피도 눈물도 없이 몰아치는 동생들을 냉정하게 처단하지 못한 혜종[* 동생들의 외가 세력에 눌려서 어쩔 수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정종(고려 3대)|왕요]] - [[광종(고려)|왕소]] 세력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외려 역적으로 몰려버린 왕규, 군권은 장악했지만 정치적 기반이 없었고 끝내 반란을 일으켰다가 자멸해버린 왕규와 연합하지도 못한 채 귀양지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박술희.[* 다만 왕규 본인이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옹립하기 위해 일으킨 쿠데타가 아니라 동생들인 왕요와 왕소 그리고 왕식렴을 비롯한 반대파들이 일으킨 친위 쿠데타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럴 경우 왕규에게 먼저 선빵을 날린 쪽은 오히려 이들이 될 수 있으며, 그 사전 작업격으로 박술희를 귀양지에서 암살해버렸다는 것. 상당히 개연성 있는 이야기로, 이 설을 따를 경우 기록에서 발생하는 모순을 자연스레 해소시킬 수도 있다.] 조선왕조의 경우도 대체로 이 부분대로 움직인 왕들이 2명 있는데, [[정종(조선)|정종]]&[[태종(조선)|태종]] 형제가 대표적이다. 실은 조선왕조도 형제승계를 초기에 했었다. 그리고 고려왕조의 경우 [[인종(고려)|인종]]의 등극만 봐도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가 [[원 간섭기]]에서는 더욱 이 부분대로 지켜진 예가 드물었고, [[공민왕]]이 조카 [[충정왕]]의 자리를 사실상 강탈하면서 다시금 발생했다.[* [[고려사]]에는 환관들과 외척들의 전횡, 왜구의 준동, 그리고 충정왕의 오만 난행들에 질릴대로 질린 대신들이 원나라에 정식으로 요청해 그를 폐위시켰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사실상 공민왕의 주도로 보고 있다. 게다가 충청왕이 [[폭군]]이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기는 하지만, 그 기록 외에는 [[교차검증]] 되는 증거도 찾을 수가 없어서 믿기도 힘들다.] 하지만 공민왕 또한 자신의 나이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사실상 못을 박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